대한민국, 세종시와 함께 한 - 이해찬 이야기

1952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의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59~1970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형들과 함께 살며 덕수중학교와 용산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도시생활이 고향에서의 유년시절에 비해 서먹하고 낯설었다. 나중에 시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농학에 관심이 갔고,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과를 택했다.

1971~1973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도중에 그만두고, 이듬해 사회학과로 과를 바꿔 새로 입학했다.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10월 유신이 선포된 뒤 학생운동을 시작했으며 교내 유인물사건에 관련되어 수배를 받았다.

1974~1975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박정희 정권의 2·15 조치로 11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76~1977

이런저런 일로 생계비를 벌면서 '재야백수' 생활을 했다. 친구 소개로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 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1979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서울대 근처에 광장서적을 개업했다. 책을 좋아하고 좋은 책을 펴내는 데도 관심이 많아 출판사 '판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등록을 취소당하여 1979년 다시 돌베개출판사를 설립했다.

1980~1982

1980년 서울대에 복학하여 복합생협의회장을 맡았으나 5월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2년 반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3~1987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했으며, 1987년 6월 항쟁 대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상황실장을 맡아 일했다.

1988~1991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3대 국회의원(서울 관악을)에 당선되어 원내부총무로 일했다. 이후 광주민주화운동특별위원회 간사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탰으며, 노동위원회·경제과학위원회 등에서 상임위활동을 했다. 입당 때부터 큰 책임감을 느끼며 추진한 야권통합운동과 당내민주화가 좌절되면서 1991년 6월 탈당했다가 야권이 통합된 뒤 다시 입당했다.

1992~1997

제14대, 제15대 총선에서 연이어 당선되어 3선의원이 되었다. 1992년 당무기획실장을 거쳐 1996년에는 정책위원장이 되는 등 당내에서 주로 기획이나 정책분야 일을 맡았다. 또한 1992년 대선 때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기획실장, 1995년 제15대 총선 때 총선기획단장, 1997년 대선에서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는 등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전략을 짜는 일을 계속 맡았다. 1995년 서울시장선거에서 조순 후보가 승리한 뒤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취임하여 행정부 일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이 자민련과 공조를 추진할 때 정책위의장으로서 정책공조협상을 이끌었다.

1998~1999

제15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위 간사로 정권 인수인계과정에 참여했다. 1998년 2월 제38대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999년 5월까지 1년 3개월간 장관직을 수행했다.

2000~2002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4선의원이 되었으며, 2년에 걸쳐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전략, 후보단일화협상 등을 이끌었다.

2003~2006

대선 뒤 당 개혁추진과정에서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단기획단장을 맡아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5선의원이 되었다. 2004년 6월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2006년 3월까지 1년 9개월 동안국정을 수행했다. 총리직을 사임한 뒤 예전부터 천착해왔던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립에 기여하기 위해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7~2008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의 제17대 대통령후보경선에 출마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패배 후 2008년 1월 당을 탈당하고 제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진보와 개혁의 새로운 가치 재정립을 목표로 출범한 재단법인 '광장' 이사장을 맡으며 진보개혁세력의 싱크탱크 설립에 주력했다.

2009~2010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인 '민주대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민주통합시민행동' 발족에 참여했고, 2009년 9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실천하고자 창립한 '시민주권'대표를 맡아 시민정치운동을 선언했다. 2009년 8월 발족한 '노무현 대통령 추모기념사업회' 위원장으로서 2009년 9월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출범을 이끌었다.

2011~2012

야권의 '혁신적 통합정당' 건설을 목표로 발족한 '혁신과통합' 상임대표로 활동하며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창당을 이루었다. 2012년 제 19대 총선을 불과 22일 앞두고 세종시 출마를 전격 선언하는 승부수를 던지고, 전국 최고투표율을 기록한 격전지에서 압승하여 세종특별자치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당내 최다선인 6선의원이 되었다.
제18대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루어 제3기 민주진보정보를 수립하는 마지막 정치적 소임을 이루겠다며 출마한 2012년 6월 당대표경선에서 민주통합당의 두 번째 당대표로 선출됐다. 그후,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 18일 정권교체와 후보단일화를 위해 당대표 직을 사임했다.

2013~2016

2013년 세종특별자치시설치특별법 전부개정안을 통과시켜 세종시 정상건설을 위한 법적,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014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2015년 고 문익환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은 사단법인 통일맞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으로서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평화와 동북아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의 '정무적판단'으로 공천 배제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세종시민의 선택을 받았다.

현재

제 20대국회의원(7선, 세종특별자치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재)광장 이사장
(사)통일맞이 이사장